#연재를 시작하며
나는 도사가 되는게 꿈이었다. 왜 도사가 될려고 했는가는 모르겠다. 어렸을때부터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은 장래희망이 도사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도사가 되는데는 실패했다. 중간에 노력은 나름대로 한다고 했지만 생각한대로 진도가 나가지 못했고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 노력도 필요하기는 했지만 도사는 노력한다고 되는 것만은 아니고 타고난 자질도 상당부분 작용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찌되었든 도사 되는 것은 실패했지만 전국의 명산대천을 여행다니면서 이산 저산의 도사들을 많이 만나 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야기 거리를 장만하는 소득은 있었던 것 같다. 밥 먹고 사는 집 자식들이었던 내 친구들은 뉴욕과 LA,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영어와 불어책을 들고 씨름할 때 나는 지리산, 계룡산, 모악산, 속리산을 헤매고 다녔던 것 같다. 그 산속의 바위밑과 흙으로 지은 토담집에서 살던 사회생활 부적응자들, 아니면 체제의 속박을 싫어해서 산으로 왔던 자유로운 영혼들, 아니면 미신종사업자, 아니면 도사들과 승려들을 만나고 다녔다. 이제 60세가 되니까 이런 내용들을 정리해서 소설도 써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소설이니까 큰 전제는 허구와 상상력이다. 상상력도 최소한의 씨앗은 있어야지 상상이 가능해진다. 맨땅에 헤딩은 못한다. 그 상상력의 씨앗은 사실이 된다. 연재 내용 가운데는 사실도 있고 허구의 상상력도 있다. 사실과 근거 없는 내용이 섞여 있다. 우리 삶이 사실과 허구의 혼합이 아니던가. 소설이니까 사실보다는 허구의 상상력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1. ‘열사(熱沙)의 사막으로 가거라’
오전 10시쯤은 하루 일과 중에서 차를 마시는 시간이다. 12지로 말한다면 사시(巳時)에 해당한다. 불교 절에서는 ‘사시마지’가 있다. 사시에 대웅전 법당의 부처님께 밥을 올리는 시간이다. 좋은 그릇. 누르스름한 놋그릇이나 방짜 유기로 만든 그릇에 밥을 담아서 정성스럽게 불상 앞에 올려 놓는다. 부처님은 사시에 식사하는 습관이 있는 셈이다. 나는 사시에 차를 마신다.
사(巳)는 인신사해(寅申巳亥) 가운데 하나이다. 역마살(驛馬殺)에 해당한다. 사주 팔자에 역마살이 많은 나는 하루중에서 역마살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사시에는 되도록 방바닥에 앉아 있으려고 차를 마신다. 또 한가지 사(巳)는 불에 해당한다. 불은 위로 뜨는 성질도 있다. 자꾸만 위로 뜨다 보면 사고 나기 쉽다. 뜨다 보면 오버 한다. 오버 하면 결국 코피 나고 갈비뼈 부러지게 되어 있다. 아래로 가라 앉혀야 한다. 어떻게 아래로 가라 앉히느냐? 물을 부어야 된다. 차를 마시면 반강제적으로 물을 몸 안에다 붓는 수행을 하게 된다. 물이 들어가니까 불이 좀 잠재워 진다고나 할까. 차를 마시는데에도 일부러 12지(支)를 따져서 마시는 것은 인생만사에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사주명리학의 가르침을 신봉하다보니까 생기게 된 습관이다. 그러나 아무리 옳은 가르침이라도 너무 지나치게 신봉하면 꼭 부작용이 따라 온다. 지나치게 착한 사람에게는 나중에 악이 따라오고, 지나치게 아름다움을 추구하면 나중에 더러운 구정물을 뒤집어쓸 사건이 생기는 경우를 주변에서 가끔 목격하였다.
사시에 찻상을 마주하면 나 자신과 홀로 대면하는 시간이다. 오로지 나를 위한 시간이다. 조용히 앉아 전기 포트에서 뽀글뽀글 끓는 물소리를 듣는 것도 좋다. 끓는 물 소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명상 거리가 된다. 물이 끓고 나면 대만의 명인이 만든 당성(唐盛) 차호. 붉은 색의 당성 차호를 좋아한다. 혼자 마실 때 쓰는 조그만 차호(茶壺). 손잡이에 손가락이 겨우 들어가는 작은 차호에다가 보이차 7542를 넣고 흑갈색의 차를 한잔 우려 마시면 ‘이만하면 나쁜 인생이 아니다’라는 느낌이 올라온다.
느긋하게 나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는데 ‘따르릉’ 휴대폰이 울린다. ‘웬 방정맞게 이 시간에 전화가 온단 말인가!’. 이 시간의 전화는 대개 안 받는다. 그러나 그날은 안 받을까 하다가 받았다. 이런때 전화를 받고 안 받느냐에 따라 인생 스토리가 갈리기도 한다. 순간이 사건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 순간은 어떻게 보면 우연이다. 우연이 인연을 만든다. 혼자만의 차를 마시는 오붓한 시간을 깨는 전화를 안 받을수도 있는데, 왜 번호가 입력이 안되어 있는 모르는 전화를 받을까? 전화를 건 사람의 조상 혼령들이 나로 하여금 전화를 받도록 압력을 행사했을 가능성도 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사 미묘하면서도 결정적인 찰나의 순간에는 이러한 신명계의 보이지 않는 음부공사(陰府公事)가 작동한다.
10.26에서 김재규가 박통을 총으로 쏘고 나서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갈림길을 만났다. ‘국방부로 갈 것인가, 중앙정보부로 갈것인가’ 를 운전사가 물었을 때의 순간이 아마도 이런 음부공사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중앙정보부로 가자고 했어야는데, 순간 김재규는 국방부로 가자고 말을 뱉어 버렸다. 이 순간을 놓고 후대의 평론가들은 김재규가 치밀한 각본이 없이 우발적으로 일을 저질렀던 증거다고 이야기한다. 이때 ‘국방부로 가자’는 순간적인 결정에서 김재규의 모든 운명이 결정되어 버렸다.
그 1-2초의 순간. 치밀한 계산과 이성이 작동되지 않는 이 미묘한 순간이 인생사의 분기점이 될 수도 있다. 아주 짧으면서도 그 어떤 불확실한 결정을 하는 순간을 운명론자들은 주목한다. 이 순간이야말로 그 집 조상들이 혼령, 아니면 그 사람을 보호하는 보호령이 작동하는 순간이다. 그 보호령의 급수가 낮으면 낮은 결정을 내리고 아니면 작동 자체가 멈춰버리는 상황도 있다고. 그 순간에 차분해야 한다. 허둥대지 말고.
사시에 차를 마시는데 전화를 받았다. “누구십니까?”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든 중년 남자의 목소리였다. 젊은 아가씨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대뜸 직설을 쏘았다. 거추장 스러운 서론 없이 바로 본론이었다. “저. 최규선 게이트의 최규선입니다. 제가 감옥 안에서 선생님 책을 열심히 보았습니다. 거기 보니까 도사들 소개한 내용도 있더군요. 지금 감옥에서 나온지 얼마 안되었는데 제 인생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제가 가야 할 길을 알려줄 도사님 좀 소개해 주세요.” 최규선 게이트라니? DJ 정권때의 금융사건 아닌가. 그 당사자가 최규선인데, 지금 전화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 최규선이라는 이야기 아닌가. 대개 이런 창피스런 사건 당사자는 자기 이름을 얼른 밝히지 않는다.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근데 이 사람은 얼굴을 알지도 못하는 책의 필자에게 곧 바로 자기를 게이트의 당사자라고 밝히는 점이 내 맘에 들었다.
“생년월일시는 어떻게 됩니까?” 불러주는 생년일시를 듣고 만세력을 뽑아보니 ‘己亥,壬申,壬午,甲辰’이 나온다. 사주의 특징이 임수(壬水)가 2개라는 점이다. 壬月의 壬日에 태어났다. 임수는 큰 강물이다. 이 큰 강물이 하나도 아니고 두 개다. 따블로 임수가 들었으니 이 사주는 홍수가 나서 물이 범람하는 사주이다. 홍수가 나면 모든 것을 쓸고 간다. 살림살이, 키우던 소와 돼지, 초가지붕 등이 범람하는 물에 둥둥 떠내려가는 풍경이었다. 이렇게 큰 홍수가 난 사주팔자는 내가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이럴 때는 토스도 필요하다. ‘토르 선생한테 넘겨야 겠다’라는 직감이 들었다.
토르 선생은 천둥번개 신을 모시는 인물이다. 천둥번개 신으로부터 신통력을 물려 받았다. 천둥번개를 북유럽 신화에서는 토르(Thor)라고 부른다. 할리우드 판타지 영화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신이 토르이다. 흔히 망치로 상징되기도 한다. 천둥번개는 커다란 망치로 건물을 부셔버릴수도 있기 때문이다.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신이다. 해적질로 생계를 삼았던 북유럽 바이킹들이 숭배했던 신이 바로 토르 신이다. 바이킹의 성질에 딱 맞는 신이다. 해적이 무슨 인정사정 있겠는가. 무조건 도끼와 오함마 들고 가서 때려 부시고 재물을 뺏어오고 여자들을 납치하는 삶을 살았던게 바이킹 아닌가. 그러나 토르 선생은 바이킹이 아니다. 운명을 거울처럼 들여다 보는 분이다. 고려,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뇌성보화천존(雷聲普化天尊)인 천둥번개 신을 모시고 살다 보니까 이 천둥신으로부터 그 사람의 운명을 거울에 비춰보는 신통력을 가지게 된 인물이다.
토르 선생을 찾아간 최규선이 마주했던 자신의 나아갈 길은 무엇이었나? “열사의 사막으로 가라. 거기에 당신의 돈이 있다”는 점괘 였다. 왜 열사의 사막이라는 점괘가 나왔을까? 나는 토르 선생의 이 점괘를 곰곰이 분석할 수밖에 없었다. 토르의 가피력을 받지 못한 사람은 이성과 논리로 신의 영역을, 팔자의 영역을 계산기로 두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계산기로 두드려 보니까 어슴프레 하게 그 점괘가 짐작이 간다.
대홍수가 난 상태에서 이 물을 막을 방법이 없다. 어설프게 둑을 쌓아서 홍수를 막기가 어렵다. 큰 물이 밀려오면 어설픈 둑은 무너져 버린다. 둑이 무너지면서 오히려 그 물이 더 흙탕물이 되면서 뒤죽박죽 엉켜 버리는 상황으로 악화될수 있다. 그러나 뜨거운 모래가 있는 중동의 사막으로 홍수가 흘러가면 어떻게 되는가? 모래사막으로 흘러간 물은 제 아무리 큰 홍수라도 스며들어 버릴 수밖에 없을 것 아닌가. 홍수 잡는데는 사막이 딱이다. 굳이 제방을 쌓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다.
최규선은 ‘사막으로 가라’는 토르 선생의 점괘를 듣고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중동으로 간 것이다. 중동의 누구에게 간단 말인가? 바로 사우디 출신의 ‘알 왈리드’ 왕자를 만나러 간 것이다. 알 왈리드는 세계적인 부자로 소문나 있다. 가끔 그가 타고 다니는 전용기 사진도 외신에 소개되기도 한다. 최규선이 세계적인 왕자인 알 왈리드와 어떤 연줄이 있어서 만날 수 있었는가. 그 중간에 마이클 잭슨이 있었다. 최규선이 미국에서 마이클 잭슨과 친하게 지낸 적이 있었고, 마이클 잭슨을 통해서 알 왈리드와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감방에서 나온 최규선은 사우디의 알 왈리드를 찾아갔다. 홍수 난 사주의 특징은 무대포 기질이 있다. 섬세한 계산을 하지 않고 ‘사막으로 가야 산다’고 하니까 무대포로 비행기를 타고 왈리드에게 갔던 것이다.
조용헌(강호동양학자. 작가)